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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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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 어느새 문화 코드가 되어버린 아이템.

이노무 냄비 나라 - 나도 그 냄비에 들어있는 건데기지만 - 에는
뭐 하나가 뜨면 우루루 몰려가서 너도나도 그걸 손에 쥐어야
직성이 풀리는 건데기民들이 모여 있다.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이 나라의 특성이 그러하다.

일찌기 군 제대 직전, 나름대로 세상을 혜안으로 바라보던
모 고참이 2000대의 아이템으로 꼽은 게 두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PCS로부터 시작된 핸드폰 문화,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디카였다.
무섭게도 그의 전망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이미 핸드폰의 경우
신제품이 나오는 사이클이 극단적으로 짧아져버린
극단 유행의 아이템이 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디카 또한 그러하다.
이용자들의 요구가 그대로 반영된 최신종이 점점 더 낮은 가격대로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게 좀 아쉽다', '이런 기능이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요구는 바로바로 반영되어
뭔가 딱 아쉬운 단점 하나 정도만 얹어서 신제품으로 출시된다.

디카가 각광받는 이유, 그리고 "냄비 국민들" 운운하는
근거없는 자신감의 내가 디카를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그건 바로 "마음에 안 드는 사진은 바로 지우고, 잘 찍은 사진만
내세울 수 있다는 점"
이라고 본다.
필름 시절까지 - 물론 아직도 계속되고는 있지만 - 사진이라는 것은
필름 소모가 늘어나기 때문에 시행착오에 비용이라는 변수가
발생했다. 물론, 필름 현상/인화 전까지의 두근거림도 있겠지만
뭔가 용도가 있는 촬영 후 마음대로 나와주지 않은 사진들을 보면
그 참담함이야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디카가 보편화된 지금이야 그 두근거림이 즐거움으로 변했지만,
어쨌거나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바로 확인하지 못한다는 건
필카의 오랜 숙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디카가 등장했다. 이건 문명의 신기원이었다.
콜럼버스의 달걀이라고 했던가. "LCD 화면을 통해
찍은 사진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간단한 사실이 이뤄지기까지
그렇게나 많은 기술과 시간이 들었고,
그 노력의 결정체인 디카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디카를 손에 쥔 그 누구도 자신이 바라는 사진을 "연출"해낼 수
있게 되었다. 몇 단계가 줄어든 것이다. 그리고나서
피사체가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못 찍은 사진은 지우면 된다"는 건 참으로
매력적인 요소로 다가오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시행착오와 비난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사실, 사진이 취미 - 라고까지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열의"가 있지는 않다 - 라고 말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디카라는 놈을 쥐고, 그 놈을 통해 뽑아낸 사진들을 통해
(그다지 비난받지 않고) 기억을 남길 수까지 있다는 점은
나 같은 성격의 소유자에게 더할 나위 없는 포멧이다.
대다수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도, 때때로 떠나는 여행에도,
심지어는 퇴근길에 길에서 만난 고양이 한 마리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게다가 마음에 안 드는 생산물은 지워버리고, "잘 찍었다", 아니
"잘 남겠다 이정도면"이라고 생각하는 사진만 남기면 된다.

그 결과, 나는 두 대의 디카를 굴리게 되었다.
하나는 풀 수동, 나머지 하나는 그야말로 "막 찍기"용이다.
두 대에겐 판이한 미션을 부여한다. 풀 수동 녀석에게는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줄 지도 모르는 사진을,
나머지 꼬맹이에겐 뭘 찍어도 좋다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 결과 전자는 결혼식 및 행사 전용으로, 후자는 거의 음식사진 전용(^^)으로
성격이 정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사진에 뭔가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피사체를 - 주관적 기준. 그러나
어느 정도는 상대적 기준 - 가장 잘 찍게 된다고 한다.
남에게 "아, 잘 찍는군"이란 칭찬이나 "그것도 사진이냐"는 비난은
들어도 상관 없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내가 찍어 뽑혀 나온 사진은
내 기억을 지배하고 있고, 그 기억 아니 사진 속에서
내가 찍은 피사체들은 나에게 의미를 주고 있기 때문.

언젠가는 필카를 쓸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렌즈 갈아끼우는
으리으리한 카메라를 손에 쥐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 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적어도, 이 놈을 쥐고 있는 순간 만큼의 나는 무적이다.
그 생각 하나로 자신감을 얻는다. 그뿐이다.


잠고냥 이렇게 깊은 뜻이 있었군! 2005/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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